최태용
인물
최태용(崔泰瑢, 1897~1950)은 일제강점기의 한국 개신교 목사이다. 무교회주의에서 출발해 1935년 한국인이 스스로 세운 교단인 기독교조선복음교회(지금의 기독교대한복음교회)를 창립하고 초대 감독을 지냈다.
생애
1897년 12월 18일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수원농림학교에 다니던 1913년 기독교인이 되었고, 전계은·현순 목사 등에게서 신앙 지도를 받았다고 전한다. 1920년대 초 신학을 공부하려고 일본에 건너갔다. 그곳에서 무교회주의를 이끌던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 그 문하에서 배웠다. 무교회주의는 제도로서의 교회 없이 성경 연구 모임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자는 일본의 기독교 운동이다.
1920년대 중반 귀국한 뒤 개인 잡지 『천래지성(天來之聲)』을 창간하고 이어 『영과 진리』를 펴내면서 한국 교회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1925년 12월 서울 YMCA 강당에서 '신앙혁명선언'을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무렵부터 무교회주의에서 조금씩 멀어졌다고 본다. 그 뒤 다시 일본으로 가서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 신학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귀국한 뒤에는 '조선의 신학, 조선의 신학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전국을 다닌 것으로 전한다.
1935년 12월 22일 서울 소격동에서 기독교조선복음교회를 창립하고 초대 감독이 되었다. 광복 뒤에는 신앙 단체인 신생회를 조직했다.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농민회 부회장과 농민훈련원 원장을 맡아 농촌운동에 힘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북한군에게 끌려가 희생되었고, 날짜는 9월 11일로 전해진다.
사역과 업적
- 교회 비판과 문서 전도: 「제도냐 신앙이냐」, 「사업이냐 생명이냐」 같은 글을 써서 제도와 사업에 치우친 교회를 비판했다. 교회의 본질은 제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신앙이라고 주장했다.
- 무교회에서 제도 교회로: 연구자들은 그가 교회 밖에서 교회를 개혁하자고 외치는 데 한계를 느껴 무교회주의를 버리고 제도 교회를 받아들였다고 정리한다.
- 복음교회 창립: 창립 당시 소속 교회는 8곳이었다. 이 교회는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라,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라,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이어라"라는 세 가지 방향을 내세웠다. 서구 교회와 선교사에게서 정치·경제·신앙 면에서 모두 독립한 교회를 세우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기독교조선복음교회는 외국 선교부가 아니라 한국인이 직접 세운 자생 교단으로 소개된다. 지금은 기독교대한복음교회로 이어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원 교단으로 활동한다. 그가 내세운 '작고 순수한 민족교회' 구상과 '조선적 기독교' 주장은 토착화 신학 논의와 함께 언급되기도 한다. 교단은 그의 이름을 딴 기념강좌를 열어 그의 교회론을 되새겨 왔다.
평가
- 신학 논란: 최태용은 예수가 이 땅에 있을 때에는 완전한 육(인간)이었다는 이른바 '순육론'을 주장했다. 또 조선 교회가 성경 자체를 숭배하는 '성서주의'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이런 주장은 당시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기독론·성경관과 맞지 않았고, 연구자 전인수는 이 때문에 그가 이단이라는 비판까지 받았다고 정리한다. 최태용 자신은 자기 신학을 교회 개혁을 위한 '새 복음'으로 여겼다.
- 친일 문제: 복음교회는 교단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최태용 개인은 일제 말기에 친일 논설을 썼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는 창립 70주년을 맞아 설립자의 친일 행적을 공개하고 회개하는 고백문을 발표했다. 언론은 이를 개신교 교단 가운데 처음으로 친일 행적을 회개한 사례로 보도했다. 전인수는 그가 1916년 전도의 사명을 받은 뒤 정치적 민족주의를 내려놓은 데서 이런 글의 사상적 바탕을 찾는다.
함께 보기 8
참고한 자료 9곳
- 최태용 (종교인) - 위키백과
- [이주일의 역사] 최태용과 '기독교조선복음교회' - 주간기독신문
- 최태용의 교회론: 전개과정과 특징 - KCI
- 전인수, 한국기독교와 역사 39호(2013) - RISS
- 복음교회, 개신교 최초로 친일행적 회개 - 뉴스앤조이
- 최태용 목사가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봤다면 - 크리스천투데이
- 최태용 - 나무위키
- 기독교대한복음교회 - 위키백과
- 기독교대한복음교회 - 디지털김제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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