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익
인물
이자익(李自益)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에 활동한 한국 장로교 목사이다. 김제 부호 집안의 머슴 출신으로 목사가 되어 장로회 총회장을 세 차례 지냈고, 대전신학교 초대 교장을 맡았다.
생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882년 경상남도 남해에서 태어났다. 생몰년은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적혀 있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었고, 10대 후반에 행상(떠돌며 물건을 파는 장사)을 하다가 전라북도 김제 금산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 부호 조덕삼의 집 마부이자 머슴으로 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노예 출신'으로 소개되지만, 자료들이 전하는 그의 처지는 노비가 아니라 남의 집에 고용되어 일하던 머슴이다.
1904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루이스 테이트(한국 이름 최의덕)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에 입문했다. 이후 테이트의 조사(助事, 선교사를 도와 전도하고 교회를 돌보던 한국인 사역자)로 활동했다. 테이트가 세운 두정리교회(지금의 금산교회)에서 주인 조덕삼보다 먼저 장로로 뽑혔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조덕삼은 이 결과를 받아들여 그를 섬겼고, 그가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학비와 가족의 생활비를 댔다고 한다. 신학교 입학 시기는 1908년, 1910년 등 자료마다 다르다. 1915년 목사 안수를 받았고, 만년은 김제 금구면 원평리에서 보냈다.
사역과 업적
신학교를 마친 뒤 금산교회의 청빙을 받아 담임목사가 되었다. 옛 주인 조덕삼이 장로로 있는 교회에 목사로 부임한 것이다. 이후 구봉리교회(지금의 원평교회)에서도 시무했다. 전북노회장을 지냈고, 1924년 함경남도에서 열린 제13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뽑혔다.
총회장을 지낸 직후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요청을 받아 약 11년 동안 경상남도 거창·합천·함양 일대 교회를 순회하며 돌보았다. 거창 사역을 시작한 해는 1925년, 1926년, 1927년 등 자료마다 다르다. 이 시기에 경남노회장으로 추대되었고, 마산 문창교회 분규 등 지역 교회의 갈등을 중재한 것으로 전해진다.
해방 뒤에는 1947년 제33회, 1948년 제34회 총회에서 잇달아 총회장으로 뽑혀 모두 세 차례 총회장을 지냈다. 당시 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 문제의 처리와 조선신학교 김재준의 신학 노선을 둘러싼 논쟁으로 갈등이 깊어지던 때였다. 이 갈등은 뒤에 한국 장로교 분열로 이어졌다. 그는 이후 대전노회장을 지냈고, 오늘날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 속한 대전신학대학교의 전신인 대전신학교에서 초대 교장을 맡았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조덕삼과 이자익의 이야기는 신분의 벽을 넘어 직분과 섬김을 앞세운 사례로 여겨져 한국 교회의 설교와 교회사 교육에서 자주 인용된다. 두 사람이 섬긴 금산교회의 ㄱ자 한옥 예배당은 남녀 자리를 나누던 초기 한국 교회의 모습을 간직한 유적으로 보존되어 있다. 대전신학대학교 총장을 지낸 문성모 목사는 그를 재조명하고 이자익목사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2025년에는 거창 선교 100주년을 맞아 그가 1929년에 직접 쓴 일기를 풀이한 책이 나왔다.
평가
그를 기리는 쪽은 큰 교회의 청빙을 사양하고 평생 농촌 교회를 지킨 청렴한 목회자이자 신사참배 회유에 굽히지 않은 인물로 평가한다. 반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일제 말기의 그가 비교적 조용히 목회에만 전념했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신사참배 시기에 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자료마다 서술이 다르다. 그를 겨냥한 뚜렷한 비판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생몰년과 주요 사역 연도가 자료마다 엇갈리는 만큼 사료에 근거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점이 남아 있다.
함께 보기 7
참고한 자료 4곳
- 이자익(李自益)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청렴한 목회자 이자익 목사 - 한국기독공보
- 문성모 목사, '이자익 목사 일기' 출판 - 장로신문
- 이자익과 조덕삼의 아름다운 한국교회이야기 - 뉴스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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