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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인물 · 같은 말: 김대현 장로

김대현(金大鉉, 1873년 또는 1876년~1940년)은 일제강점기 장로교 장로이다. 서울 승동교회 장로로 큰돈을 내어 조선신학원(한신대학교의 전신)을 세우는 바탕을 마련했고, 초대 원장을 지냈다.

생애

경상북도 영일 출신이다. 태어난 해는 자료마다 1873년 또는 1876년으로 달리 적혀 있다. 1901년 관립의학교를 수료했고, 같은 해 숭령전 참봉(조선 시대 하급 관직)이 되었다. 그 뒤 흥해면협의원, 흥해공립보통학교 교무위원, 흥해명신학교 학감 등을 지내며 개화기 교육 사업에 힘썼다.

기독교로 개종한 뒤 서울로 옮겨 승동교회에 교적을 두었고, 1923년 장로가 되었다. 1940년 조선신학원이 문을 열자 초대 원장이 되었으나, 한신대학교 연혁에 따르면 그해 9월 세상을 떠났다. 후임 2대 원장은 윤인구이다.

사역과 업적

1938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흔히 평양신학교라 부름)가 신사참배 문제로 문을 닫으면서 장로교는 목회자를 길러 낼 곳을 잃었다. 1939년 3월 김대현·김영주·송창근 등이 앞장서 '조선신학원 설립기성회'를 만들었고, 김대현이 헌금을 내어 학교 기금을 마련했다. 기부액은 자료마다 30만 원, 50만 원 등으로 다르게 전한다. 그는 '금필헌(金必獻)'이라는 이름으로 십일조를 따로 모아 교회와 신학교에 바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신학원은 정식 신학교 설립 인가를 받지 못해, 경기도지사의 사설 학원 인가를 받아 1940년 4월 19일 승동교회에서 개강했다. 개원 당시 전임 교수는 윤인구, 김재준, 일본인 목사 미야우치 아키라(宮內彰)였다. 함태영도 김대현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학교 설립에 참여한 인물로 꼽힌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조선신학원은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이 스스로 돈을 내고 운영한 신학교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쪽에서는 이 일을 목회자 교육권이 선교사에게서 한국 교회로 넘어온 첫 계기로 본다. 학교는 1946년 장로교 남부총회에서 총회 직영 신학교가 되었으나, 1951년 제36회 계속총회에서 직영이 취소되었다. 이후 한국 장로교 분열을 거쳐 한국기독교장로회 계열의 한신대학교로 이어졌다. 한신대학교는 지금도 그를 설립자로 기리며 추모예배를 드린다.

평가

한신대학교 쪽은 그가 한국 교회의 목회자 양성은 한국 교회가 스스로 맡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학교를 세웠다고 평가한다. 학교를 세울 당시 일부에서는 한국인이 따로 신학교를 세우는 것이 선교사들의 공로를 무시하는 일이라며 그를 말렸다고 한다.

한편 학교가 신사참배 강요 시기에 세워진 데 대한 비판도 있다. 뉴스앤조이는 함태영 이름으로 총회에 낸 조선신학원 설립 보고서에 '황국의 교역자 양성' 같은 표현이 들어 있음을 지적했다. 또 김대현을 포함한 개교 공로자들이 신사참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신학원은 성경 비평학을 받아들이는 등 평양신학교와는 다른 신학 교육을 내세웠다. 이 노선은 뒤에 장로교 안에서 신학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함께 보기 8

참고한 자료 9곳
  1. 김대현 (1873년) - 위키백과
  2. 한신인 - 한신대학교
  3. 한신대 2025-26 대학원 요람(연혁)
  4. 한신대, 설립자 노석 김대현 장로 추모예배 드려 - 교수신문
  5. [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59) 일제 하에서의 신학교육 - 국민일보
  6. 신학 교육을 통한 한국 교회 개혁 운동의 선구자 '송암 함태영' - 한신대학교
  7.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역사와 신학 - 한국기독교장로회
  8. 감추고 싶은 '친일'에 발목잡힌 한신대 - 뉴스앤조이
  9. KRpia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본문은 이 자료들을 참고해 새로 쓴 글이며, 자료의 글을 옮겨 싣지 않았습니다.

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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