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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자실(1915~1989)은 한국 오순절 계열의 여성 목사이다. 1958년 사위가 되는 조용기와 함께 대조동 천막교회를 세웠고, 이 교회가 오늘날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되었다.

생애

최자실은 1915년 8월 15일 황해도 해주에서 1남 1녀 가운데 맏딸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는 형편에서 자랐다고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부흥사 이성봉 목사가 이끄는 천막 부흥회에 참석하여 병이 낫는 신유를 체험하고 신앙을 갖게 되었다.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도 교회로 이끌었다.

명신여학교와 평양도립병원 산파간호원 양성소를 졸업하고 신의주도립병원 산부인과에서 산파(아기를 받는 일을 하는 사람) 주임으로 일했다. 25세에 김창기와 결혼했다. 1950년대에는 산파 일을 하면서 성냥공장과 비누공장까지 운영했으나 사업에 실패해 큰 빚을 졌다. 어머니와 큰딸을 잇달아 잃고 자살까지 생각하던 무렵, 다시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해 성령을 체험했다. 이후 1956년 순복음신학교에 들어가 그곳에서 조용기를 만났다.

1989년 11월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사역과 업적

1958년 최자실과 조용기는 순복음신학교 4회로 함께 졸업하고, 서울 대조동의 천막촌에 교회를 함께 세웠다. 이 천막교회는 1962년 서대문으로 옮겨 순복음중앙교회가 되었고, 훗날 여의도순복음교회로 이어지면서 세계적인 대형교회로 성장했다. 1965년 최자실의 딸 김성혜가 조용기와 결혼하면서 두 사람은 장모와 사위 사이가 되었다. 김성혜는 뒤에 한세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최자실은 30여 년 동안 조용기의 목회를 도우며 교회 부흥과 국내외 선교에 힘썼다.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흔들며 "할렐루야"라고 인사해 '할렐루야 아줌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살면 전도요, 죽으면 천국"이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다녔다고 알려져 있다. 또 경기도 파주 오산리에 금식 기도원을 세우는 데 앞장섰고, 이 기도원은 그의 이름을 따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으로 불린다. 자서전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와 『금식기도의 열매』 등의 책을 남겼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최자실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함께한 사람으로, 한국 오순절주의 운동이 퍼져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금식기도원은 교단을 가리지 않고 많은 교인이 찾는 기도 장소가 되어, 한국 교회에 금식기도와 기도원 문화가 퍼지는 데 영향을 준 곳으로 꼽힌다. 해외 오순절 교회 선교에도 힘을 보탰다. 그가 속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는 여성도 목사가 될 수 있는 교단인데, 최자실은 그런 여성 목회자의 이른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평가

순복음 계열에서는 최자실을 기도와 전도에 헌신한 개척자이자 여의도순복음교회 부흥의 주역으로 높이 평가한다. 다른 한편,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오순절 계열이 강조해 온 신유와 축복의 메시지를 두고는 번영신학 논쟁과 맞물려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다만 최자실 개인의 활동에 대해 교단이나 연합기관이 따로 내린 공식 판단은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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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자료 3곳
  1. '할렐루야 아줌마' 최자실 목사, 사위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 부흥 이끌어 - 국민일보
  2. 최자실 - 위키백과
  3. 최자실 인물소개 - 교보문고

본문은 이 자료들을 참고해 새로 쓴 글이며, 자료의 글을 옮겨 싣지 않았습니다.

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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