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비문
역사
실로암 비문은 예루살렘의 기혼 샘과 실로암 못을 잇는 수로 터널 벽에 새겨진 고대 히브리어 비문이다. 터널 공사를 마친 과정을 기록했으며, 흔히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의 것으로 본다.
개요
실로암 비문은 예루살렘 옛 다윗 성 아래를 지나는 수로 터널의 남쪽 출구 가까운 벽에 새겨진 글이다. 이 터널은 흔히 '히스기야 터널'이라 불린다. 글은 고대 히브리 문자로 쓰였다. 고대 히브리 문자는 페니키아 문자 계통의 옛 글자로, 오늘날 히브리어 성경에 쓰이는 네모꼴 글자보다 앞선 것이다. 남아 있는 부분은 여섯 줄이며 첫머리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성경 밖에서 나온 고대 이스라엘 시대의 글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배경
예루살렘의 주요 수원은 성 동쪽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 샘이다. 이 샘은 성벽 밖에 있어서 적에게 포위되면 물을 지키기 어려웠다. 성경은 히스기야 왕이 물길을 성 안으로 끌어들였다고 전한다. 열왕기하 20:20은 히스기야가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들였다고 적는다. 역대하 32:30은 그가 기혼의 윗샘물을 막고 다윗 성 서쪽으로 곧게 끌어들였다고 기록한다. 역대하 32:2-4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쳐들어올 때 성 밖의 샘을 막았다는 이야기를 함께 전한다. 많은 학자는 이 기록과 터널, 비문을 같은 공사와 연결해 기원전 8세기 말의 일로 본다.
전개
- 1880년 발견: 터널 안에 들어갔던 현지 소년이 벽에 새겨진 글자를 처음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예루살렘에 머물던 유럽 학자들이 글을 베끼고 해독했다.
- 내용: 비문은 공사 마지막 날을 기록한다. 양쪽 끝에서 마주 보고 파 들어가던 석공들이 아직 세 규빗(옛 길이 단위로, 팔꿈치에서 손끝까지의 길이)이 남았을 때 서로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마침내 곡괭이와 곡괭이가 맞부딪치며 뚫렸고, 물이 샘에서 못까지 1,200규빗을 흘렀다고 적는다. 석공들 머리 위 바위의 높이가 100규빗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왕의 이름이나 연도는 적혀 있지 않다.
- 1891년 반출: 비문은 터널 벽에서 무단으로 떼어졌고, 이 과정에서 여러 조각으로 깨졌다.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오스만 제국 당국이 조각을 회수해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옮겼다. 현재는 튀르키예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스라엘 측이 반환을 요청한 일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과와 영향
실로암 비문은 기원전 8세기 무렵 히브리어의 글자 모양과 문법, 철자법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왕실 공덕을 기리는 공식 비문과 달리 일하던 사람들의 시점에서 공사 과정을 생생하게 적었다는 점도 자주 언급된다.
터널은 지금도 물이 흐르며 방문객이 걸어서 지나갈 수 있다. 한국 교회의 성지순례에서도 자주 들르는 곳이다. 이 터널이 이어지는 실로암 못은 신약성경에서 예수가 맹인에게 가서 씻으라고 한 곳(요한복음 9:7)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치유 이야기와 함께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평가
다수의 학자는 글자 모양과 언어를 근거로 비문을 기원전 8세기 말 히스기야 시대의 것으로 본다. 다만 비문에 왕의 이름이 없어서 연대를 둘러싼 논의가 있었다. 1990년대에는 훨씬 뒤인 하스몬 왕조 시대(기원전 2~1세기)의 것으로 보자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많은 학자가 글자체 분석을 근거로 반박했다. 2000년대 초에는 터널 회반죽 속 식물 잔해 등을 연대 측정해 기원전 700년 무렵이라는 결과를 낸 연구가 발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앙인들 사이에서는 성경의 역사 기록을 뒷받침하는 고고학 자료로 자주 인용된다. 학계에서는 비문 자체가 특정 왕을 밝히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성경 본문과 연결하는 일은 해석의 문제라고 보는 시각도 함께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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