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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선교는 1950년대 말부터 한국 개신교가 공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벌인 선교 활동이다. 처음에는 공장 전도로 시작했으나, 1970년대에는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운동으로 바뀌었다.

배경

1950년대 후반 한국에서 공업화가 시작되자 도시 공장에 노동자가 모여들었다. 그러나 기존 교회는 이들에게 거의 다가가지 못했다. 같은 무렵 세계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칼 운동(교파를 넘어 교회의 일치와 협력을 추구하는 운동)에서는 교회가 산업 현장에 들어가 노동 문제에 응답해야 한다는 '도시산업선교' 논의가 확산되었다. 한국의 산업선교는 이러한 국제적 흐름과 해외 선교사의 지원 속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개

  • 195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1959년 한국 장로교 분열 이전)가 전도부 아래 산업전도 사업을 시작한 것이 한국 산업선교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이 흐름은 분열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으로 이어졌고, 영등포 지역의 산업전도 활동이 그 중심이 되었다.
  • 1960년대 초: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인천 지역에서 산업전도를 시작했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 조지 오글(George Ogle)이 이 일에 참여하였다. 이후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성공회 등 다른 교단도 참여하였다.
  • 1960년대 후반: 활동의 초점이 공장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전도하는 것에서 노동자의 삶과 노동 조건을 함께 다루는 쪽으로 옮겨 갔다. 이에 따라 이름도 '산업전도'에서 '산업선교', '도시산업선교'로 바뀌었다.
  • 1970년대: 산업선교 단체들은 노동자 교육, 소모임, 노동조합 결성 지원에 힘을 쏟았다. 동일방직 노동조합 문제(1978년)와 YH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1979년) 등 이 시기의 주요 노동 쟁의에 관여하였다. 정부와 일부 언론은 산업선교를 노사 분규의 배후로 지목하였고, 관련 목회자와 실무자가 연행·조사를 받았다. 조지 오글은 1974년 정치적 사건과 관련한 활동을 이유로 추방되었다.

결과와 영향

1980년대에 들어 정부의 탄압이 이어졌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하는 노동운동이 성장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 기관이 중심이 된 산업선교의 비중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산업선교는 1970년대 교회의 민주화운동과 함께 한국 노동운동의 형성에 영향을 준 흐름으로 평가된다. 노동자의 고난을 신학의 자리로 삼은 민중신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영등포 지역의 산업선교 기관은 이후에도 노동자 지원과 지역 선교 활동을 이어 오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가톨릭노동청년회 등이 비슷한 활동을 벌였고, 개신교 산업선교와 협력하기도 하였다.

평가

산업선교에 대한 평가는 신학적 입장에 따라 엇갈린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원 교단 등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산업선교를 교회가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정의를 실천한 사례로 본다.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을 함께 추구한 선교의 모범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반면 보수적인 교단과 신학자들 가운데에는 산업선교가 복음 전도라는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노동운동과 정치 활동에 치우쳤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이 논쟁은 교회의 사회 참여 범위를 둘러싼 교회와 정치 논의와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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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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