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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동(韓尙東, 1901~1976)은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이끈 장로교 목사이다. 해방 뒤 부산에 고려신학교를 세웠고,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의 대표적 지도자로 꼽힌다.

생애

한상동은 1901년 7월 13일 경상남도 김해에서 태어났다. 1918년 다대포실용학교 교사가 되었다. 1924년에는 전도인 박창근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이 일로 집안에서 영원히 쫓겨났다고 전한다. 1927년 진주로 옮겨 광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8년 목회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1933년 평양의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들어가 1937년에 졸업한 뒤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일제는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신사참배는 일본의 종교 시설인 신사에 절하는 의식이다. 한상동은 이를 우상숭배로 보고 거부했다. 1938년 10월 24일에는 부산 초량교회에서 조선총독부가 강요하는 신사참배에 굴하지 말자는 뜻을 밝힌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붙잡혀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해방 뒤에 풀려났다. 옥중에서 일본 천황에게 충성한다고 말하면 풀려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으나 끝까지 거부한 것으로 전한다. 1976년 1월 6일 세상을 떠났다.

사역과 업적

해방 직후 그는 이기선 목사 등 '출옥성도'들과 함께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교회 재건을 촉구하는 부흥회를 이끌었다. 출옥성도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감옥에 갇혔다가 해방으로 풀려난 교인들을 이르는 말이다. 이어 옥중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후임으로 산정현교회에 청빙되어 담임목사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산 정권 아래에서 목회를 이어 가기 어려워지자 남쪽으로 내려와 부산에 자리를 잡았다.

부산에서 그는 옥중에서부터 기도하며 구상했다는 신학교 설립에 나섰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전통을 잇고 성경 중심의 보수 신앙을 가르친다는 취지로 세운 학교가 고려신학교이다. 1950년대 고려신학교 교수진에는 한상동과 함께 박윤선, 한부선(브루스 헌트) 등이 있었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은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교회의 순결 회복을 강하게 요구했다. 이 흐름은 뒤에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교단으로 이어졌다. 한상동은 이 교단의 대표적 지도자로 기억되며, 그가 세운 고려신학교의 전통은 고신대학교로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사참배 거부와 그 이후의 교회 재건 운동은 한국 장로교가 신앙의 정통성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오랫동안 영향을 주었다.

평가

고신 교단을 비롯한 보수 장로교 쪽은 그를 주기철과 함께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이끈 두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로 본다. 신앙의 순결을 지킨 지도자이자 애국지사로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해방 뒤 신사참배 문제의 처리와 교회 재건 요구를 둘러싼 갈등은 장로교의 분열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그 과정을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는 시각과, 교회 분열을 낳았다는 비판적 시각이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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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자료 2곳
  1. 한상동 - 위키백과
  2. 한국교회사 속 인물 - 한상동 목사 (1901-1976) :: 아촌의 이야기

본문은 이 자료들을 참고해 새로 쓴 글이며, 자료의 글을 옮겨 싣지 않았습니다.

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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