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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스 원통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 2세가 기원전 539년 바벨론을 정복한 뒤 만든, 쐐기문자가 새겨진 진흙 원통이다. 정복의 정당성과 신상·주민 귀환 정책을 담고 있어 성경의 포로 귀환 기록과 함께 자주 언급된다.

고레스 원통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성경의 바사)의 왕 고레스 2세가 바벨론을 차지한 뒤 만든 진흙 원통이다. 겉면에 아카드어 쐐기문자가 새겨져 있으며,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쐐기문자는 쐐기 모양의 획을 진흙에 눌러 새기던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자다. '고레스 실린더'라고도 부른다.

배경

기원전 6세기 중엽 메소포타미아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다스렸다. 이 제국은 느부갓네살 때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고 유다 사람들을 끌고 간 나라로, 성경은 이 시기를 바벨론 포로기로 기록한다.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는 바빌론의 주신 마르둑(예레미야 50:2의 '므로닥') 대신 달의 신을 높였고, 오랫동안 수도를 비웠다. 이 일로 바빌론 사제층의 반감을 샀다고 전해진다.

전개

기원전 539년 고레스의 군대는 티그리스강 가의 오피스에서 바빌로니아군을 물리치고 바빌론에 들어갔다. 원통 본문이 서술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마르둑이 불경한 나보니두스에게 노하여 의로운 통치자로 고레스를 골랐다.
  • 고레스는 싸움 없이 바빌론에 들어갔고 주민을 괴롭히지 않았다.
  • 다른 곳으로 옮겨졌던 신상들을 본래 신전으로 돌려보냈고, 흩어진 주민들도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 바빌론의 성벽 등을 보수했다.

원통은 건물 기초에 묻던 메소포타미아의 전통적인 건축 기념문 형식을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1879년 호르무즈드 라삼이 대영박물관의 발굴을 이끌던 중 바빌론 유적에서 찾아냈다.

결과와 영향

원통에는 유대인, 예루살렘, 여호와가 나오지 않는다. 귀환 대상으로 이름이 적힌 곳도 메소포타미아와 그 주변 도시들이다. 그럼에도 원통은 피정복민의 신앙을 존중하고 귀환을 허락한 고레스의 정책을 보여 주는 자료로 여겨진다. 그래서 에스라 1:1-4와 역대하 36:22-23에 실린 고레스의 조서와 함께 자주 인용된다. 성경은 이 조서에 따라 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다시 지었다고 기록한다.

이사야 44:28과 45:1은 고레스를 여호와의 '목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부른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이를 선지자 이사야가 고레스의 이름을 미리 예언한 것으로 본다. 비평학계의 다수는 이사야 40장 이후가 포로기 무렵에 쓰였다고 본다.

현대에는 1971년 이란 팔라비 왕조가 페르시아 왕정 2500년 기념 행사를 열면서 원통을 '최초의 인권 헌장'으로 내세웠다. 국제연합(UN) 본부에도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2010년에는 이란 국립박물관에서 대여 전시가 열렸다.

평가

원통을 정복민의 종교와 민족을 존중한 관용 정책의 기록으로 높이 평가하는 시각이 있다. 반면 고대 근동 학자 다수는 다르게 본다. 원통은 앞선 아시리아·바빌로니아 왕들의 비문 형식을 따른 정치 선전문이며, 새 통치자가 전 왕을 깎아내리고 자기 통치를 신의 뜻으로 정당화하는 글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오늘날의 '인권 헌장'이라 부르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원통 안에 고레스가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의 비문을 보았다는 대목이 있는 것도 이전 전통을 의식했음을 보여 준다.

기독교계에서는 원통을 성경 기록이 실제 역사와 맞닿아 있음을 보여 주는 고고학 자료로 소개하는 일이 많다. 다만 원통이 유대인 귀환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은 함께 지적된다. 그래서 학계는 대체로 원통을 에스라서 조서의 직접 증거가 아니라, 같은 정책 방향을 보여 주는 간접 자료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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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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