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 교황
역사
대립 교황(對立敎皇)은 천주교가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로마 교황에 맞서 스스로 교황이라 주장하거나 일부 세력의 지지로 교황에 세워진 인물을 이르는 말이다.
배경
대립 교황은 영어 antipope를 옮긴 말이다. 같은 시기에 로마 주교(교황) 자리를 놓고 둘 이상이 정통성을 주장할 때, 훗날 천주교가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한 쪽을 가리킨다. 어느 쪽이 정당한지는 대개 당대가 아니라 뒤에 정리되었다.
대립 교황이 생긴 원인은 시대마다 달랐다. 초대교회 시기에는 교리와 권징(교회 안의 징계와 치리)을 둘러싼 견해 차이가 주된 원인이었다. 중세에는 황제·왕권과 교황권의 다툼, 추기경단의 분열이 주된 원인이었다.
전개
고대
- 히폴리투스: 3세기 초 로마의 신학자이다. 교황 칼리스투스 1세의 치리 방식에 반대해 따로 공동체를 이끈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흔히 첫 대립 교황으로 꼽힌다. 235년 무렵 교황 폰티아누스와 함께 유배되었고, 그 과정에서 화해했다고 전해진다.
- 노바티아누스: 251년 코르넬리우스에 맞서 세워졌다.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 신앙을 버렸던 이들을 다시 받아들일지가 쟁점이었다. 노바티아누스는 엄격한 쪽에 섰고, 그를 따르는 노바티아누스파는 이후 여러 세기 동안 이어졌다.
중세
- 서임권 투쟁: 서임권은 주교를 임명할 권한을 말한다. 이 권한을 둘러싸고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독일 왕 하인리히 4세가 맞섰고, 1080년 하인리히 4세 쪽이 라벤나 대주교 귀베르트를 클레멘스 3세로 세웠다.
- 서방 교회 대분열(1378~1417): 1378년 우르바노 6세가 선출된 뒤, 일부 추기경이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클레멘스 7세를 따로 뽑았다. 클레멘스 7세는 아비뇽에 자리 잡았다. 1409년 피사 공의회가 두 교황을 모두 폐위하고 알렉산데르 5세를 세웠지만, 기존 두 교황이 물러나지 않아 교황을 자처하는 사람이 셋이 되었다. 분열은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가 1417년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하면서 끝났다.
- 펠릭스 5세: 1439년 바젤 공의회가 세웠고 1449년 물러났다. 흔히 역사상 마지막 대립 교황으로 꼽힌다.
결과와 영향
서방 교회 대분열은 교황의 권위를 크게 떨어뜨렸다. 분열을 공의회가 수습하면서, 공의회가 교황보다 높은 권위를 가진다는 공의회 우위설이 힘을 얻었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의 존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의 얀 후스는 교황 제도를 비판했다. 후스는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정죄되어 화형당했다. 이런 흐름은 뒤의 종교개혁을 설명하는 배경으로 자주 다뤄진다.
피사 계열의 요한 23세는 천주교 공식 목록에서 정당한 교황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1958년 선출된 교황은 같은 이름인 요한 23세를 다시 쓸 수 있었다. 근현대에도 일부 소규모 집단이 따로 '교황'을 세운 일이 있으나, 영향력은 크지 않다.
평가
- 천주교는 교황청 연감의 교황 목록을 기준으로 대립 교황을 구분한다. 서방 교회 대분열 시기에 대해서는 오늘날 로마 계열을 정통으로 본다. 다만 몇몇 인물은 정통성 판단이 어렵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며, 대립 교황의 수도 목록과 학자에 따라 30여 명에서 40명 가까이로 다르게 센다.
- 정교회는 동서 교회 분열 이후 교황의 수위권(교회 전체에 대한 으뜸 권한)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립 교황 문제를 로마 교회 내부의 일로 본다.
- 개신교 역시 교황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대립 교황'을 주로 역사 용어로 쓴다. 개신교의 교회사 서술에서는 서방 교회 대분열과 공의회 운동을 종교개혁에 앞선 교회 개혁 요구의 흐름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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