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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전백(梁甸伯, 1869~1933)은 1907년 처음으로 목사 안수를 받은 한국인 장로교 목사 일곱 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105인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고,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생애

양전백은 조선 말기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릴 때 한학(漢學, 한문으로 된 유교 학문)을 공부했고, 젊은 시절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 뒤 평양의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했다. 1907년 6월 길선주·이기풍·방기창·서경조·한석진·송인서와 함께 첫 졸업생이 되었다. 같은 해 독노회(한국 장로교 최초의 노회)가 조직되면서 이 일곱 명은 한국인으로는 처음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사역과 업적

목사가 된 뒤에는 평안북도 선천 지역을 중심으로 목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천은 당시 서북 지방 장로교 활동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1911년 일제가 105인 사건을 일으켜 서북 지방의 기독교인과 민족운동가를 대거 붙잡았을 때 양전백도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후 풀려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이 일로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장로교 총회장을 지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양전백은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이 교회를 맡아 이끄는 시대를 연 첫 세대 목회자이다. 이 첫 일곱 목사의 안수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내세운 자립·자치 원칙이 실제로 이루어진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또 그의 삶은 초기 한국 장로교에서 신앙과 민족운동이 깊이 얽혀 있었음을 보여 준다. 길선주와 함께 장로교 목사로서 105인 사건과 3·1운동에 모두 관련된 인물로 꼽힌다.

평가

한국 교회에서는 그를 초기 목회자이자 민족운동에 참여한 신앙인으로 기린다.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훈장을 추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민족대표 33인이 3·1운동에서 한 역할을 두고는 학계와 대중 사이에서 평가가 엇갈리는 논의가 있다. 양전백 개인에 대해 따로 알려진 비판은 확인되지 않는다.

함께 보기 8

참고한 자료 1곳
  1. 송인서 - 위키백과

본문은 이 자료들을 참고해 새로 쓴 글이며, 자료의 글을 옮겨 싣지 않았습니다.

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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