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도
인물
손정도(孫貞道, 1882~1931)는 일제강점기의 감리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의장과 교통부 총장을 지냈고, 말년에는 만주 길림에서 목회와 농민 운동을 했다.
생애
평안남도 강서군의 유교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연도는 자료에 따라 1881년과 1882년으로 다르다. 과거를 보러 평양에 가던 길에 한 목사를 만나 기독교로 회심(믿음을 갖게 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상투를 잘랐고, 이 일로 집안의 반대를 받아 집을 떠났다. 이후 평양에서 활동하던 감리교 선교사 무어(J. Z. Moore)의 도움으로 숭실학교에 들어가 1908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졸업생으로는 조만식 등이 있다.
재학 중 평양 대부흥의 영향을 받아 목회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협성신학교(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했다. 1911년에는 집사 목사 안수를 받았다. 집사 목사는 당시 감리교 목사 안수의 첫 단계였다.
사역과 업적
안수를 받은 뒤 만주 지방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베이징에서 민족운동가들과 만난 일 때문에 '가쓰라 암살 음모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 사건으로 고문을 받고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되었다.
1919년 3·1운동 뒤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는 일에 참여했다. 신분이 드러날 것을 염려해 가명이나 익명으로 실무를 맡은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 이후 임시의정원 의장과 교통부 총장을 지냈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에 평안도 대표로 참석해 재정위원으로 활동했는데, 이것이 임시정부와 관련된 마지막 활동이었다.
그 뒤 북만주 길림으로 옮겨 교포들을 상대로 목회했다. 또 농민 중심의 단체인 농민호조사를 세워 농촌 교육, 농사 기술 개발, 보건위생 사업을 벌였다. 길림 시절에는 만주 군벌에게 붙잡힌 청년 김일성을 손정도 가족이 옥바라지했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손정도를 아버지처럼 존경했다고 적었다.
죽음과 이후
고문 후유증과 과로로 건강이 나빠졌고, 1931년 2월 19일 길림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례비가 없어 한동안 묻힐 곳을 구하지 못했다. 같은 해 6월 개성에서 열린 감리교 연회에서 추도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감리사 배형식이 이 사정을 알렸고 이를 계기로 장례비가 모였다. 유해는 길림 북산에 묻혔다가 1996년 9월 국내로 옮겨져 국립서울현충원 임정요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손정도는 평양 대부흥을 겪고 목회자가 된 세대에 속한다. 그는 목회와 독립운동을 함께한 감리교 인물로 기억된다. 안창호와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고, 감리교회에서는 신앙과 민족운동이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로 다룬다. 아들 손원일은 대한민국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지냈다.
평가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2007년 4월 그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일부 연구자는 그를 임시정부의 여러 세력을 하나로 묶은 인물로 평가한다. 남한에서는 독립운동가로 기려지고, 북한에서는 김일성 회고록을 통해 우호적으로 언급되어 남북 양쪽에서 함께 거론되는 드문 인물이다. 다만 김일성과의 관계는 주로 김일성 회고록에 기대어 알려진 내용이다.
함께 보기 8
참고한 자료 6곳
- 손정도 - 위키백과
- 손정도 목사 - ResourceUMC
- 삼손(三孫)을 아시나요? - 가스펠투데이
- [이정은의 역사칼럼] 손정도 목사(1) - 천지일보
- 안창호 손정도 뮤지컬! - 당당뉴스
- 손정도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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