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식
인물
조만식(曺晩植, 1883~1950)은 호가 고당(古堂)인 독립운동가·교육자·정치인이며 장로다. 오산학교 교장을 지냈고, 물산장려운동과 신간회를 이끌었으며, 광복 뒤에는 조선민주당을 이끌었다.
생애
조만식은 1883년 2월 1일에 태어났다. 출생지는 흔히 평안남도 강서군으로 소개되지만, 독립운동인명사전은 평양부 진향리로 적고 있다. 열다섯 살 무렵 장사를 시작했고, 스물두 살 이후로는 장사와 함께 종교 활동에 힘썼다. 늦은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귀국한 뒤 오산학교 교사로 일했고, 1915년에 교장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평안남도 사천에서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이어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려다 체포되어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광복 직후 평양에서 조선건국준비 평남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이후 조선민주당 총재가 되었다. 1946년 1월 모스크바 삼상회의(미국·영국·소련 외무장관 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에 반대하자, 소련 군정은 그를 평양 고려호텔에 가두었다. 그해 2월 조선민주당 안에서 그를 규탄하는 선언문이 채택되었고, 강양욱이 임시 당수로 뽑혔다. 그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평양에서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역과 업적
- 교육: 오산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 경제 자립 운동: 국산품을 쓰고 일본 상품을 사지 말자는 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섰다.
- 민립대학 설립 운동: 민간의 돈을 모아 우리 손으로 대학을 세우려 한 민립대학 기성회 운동을 이끌었다.
- 신간회: 좌우 세력이 함께 참여한 신간회가 만들어지도록 힘썼고, 중앙위원과 평양지회장을 맡았다.
- 기독교 단체 활동: 기독교 청년 단체인 YMCA의 평양 조직을 세우는 일을 주도했다(한국 YMCA 참고).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조만식은 목회자가 아니라 교회의 장로로서 교육·경제·정치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평신도의 사회 참여나 신앙과 민족운동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자주 거론된다. 공산 정권 아래에서 감금된 뒤 끝내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그의 마지막은 북한 교회와 한국전쟁과 교회의 역사를 다룰 때도 언급된다. 신앙인이 정치에 어디까지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교단과 신학 전통마다 견해가 다르다(교회와 정치 참고).
평가
대한민국 정부는 1970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주었다. 국가보훈부는 그를 "민족의 사표(본받을 만한 스승)"라 부른다. 좌우 협력에 힘쓴 점과, 광복 뒤 신탁통치 반대 운동과 민족 자주 독립운동을 이끈 점을 높이 평가한다. 출생지와 사망 경위처럼 기록마다 다르거나 확인되지 않은 부분은 앞으로 더 보완해야 한다.
함께 보기 8
참고한 자료 5곳
- 조만식 - 위키백과
- 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 이달의 독립운동가 조만식 - 공훈전자사료관
- 고당 조만식선생 동상 - 현충시설정보서비스
- 조만식,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기 위해 노력하다 -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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