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즈먼드 투투
인물 · 같은 말: 투투
데즈먼드 투투(1931~2021)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성공회 대주교다. 인종 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공로로 198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진실과화해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생애
1931년 10월 7일 남아프리카 연방 트란스발 지방의 클레르크스도르프에서 태어났다. 교사로 일하다가 신학교에 들어가 1960년에 부제(사제가 되기 전 단계의 성직), 1961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62년부터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966년에 돌아와 신학교와 대학에서 가르쳤다.
1975년 요하네스버그 대성당의 주임사제가 되었고, 1976년에는 레소토 주교가 되었다. 이어 남아프리카교회협의회 총무를 지냈다. 1985년 흑인으로는 처음 요하네스버그 주교가 되었고, 1986년에는 역시 흑인 최초로 케이프타운 대주교에 올라 남부 아프리카 성공회를 이끌다가 1996년에 은퇴했다. 2021년 12월 26일 케이프타운에서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역과 업적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아파르트헤이트는 백인 정권이 인종에 따라 사는 곳과 교육, 정치적 권리를 갈라놓은 인종 분리 정책이다. 투투는 이 제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국제 사회에 남아공에 대한 경제 제재를 요구했다. 1979년에는 남아공산 석탄 불매를 촉구한 뒤 정부에 여권을 압수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4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진실과화해위원회. 1995년 남아공 의회가 위원회 설치법을 통과시켰고, 같은 해 12월 투투를 위원장으로 위원회가 꾸려졌다. 위원회는 1961년부터 1990년까지 일어난 인권 침해를 조사하고, 피해자의 증언을 듣고, 가해자의 사면을 심사했다. "용서 없이 미래 없다"는 그의 말은 이 화해 작업을 상징하는 구호가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난 뒤의 남아공을 '무지개 국가'라고 부른 사람도 그였다.
신학과 은퇴 이후. 신학적으로는 흑인 신학과 아프리카 신학을 함께 아우르려 했다고 평가된다.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세계 원로 지도자 모임인 '디 엘더스(The Elders)'의 초대 의장을 맡았고, 2013년에 템플턴상을 받았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용서 없이 미래 없다』(홍성사, 2009)를 비롯한 그의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2021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국내 언론이 그의 생애를 비중 있게 다뤘다. 그가 속한 세계 성공회 공동체에는 대한성공회도 속해 있다. 그가 한국을 방문했는지, 한국 교단과 직접 교류했는지는 확인된 자료가 적어 보충이 필요하다.
평가
넬슨 만델라와 함께 남아공 민주화를 이끈 두 지도자로 꼽힌다. 용서와 화해를 앞세운 사회 통합의 길을 보여 주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한편 경제 제재를 요구하던 시기에 백인 사회 일부는 그를 매국노라고 비난했고, 흑인 쪽에서도 그의 투쟁 방식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은퇴 뒤에는 성소수자 인권처럼 교회 안에서 논쟁이 되는 주제에도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이에 대한 평가는 교단과 신학적 입장에 따라 엇갈린다. 교회와 정치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다.
함께 보기 6
참고한 자료 10곳
- Desmond Tutu - Wikipedia
- Desmond Tutu - Britannica
- Desmond Tutu Becomes Archbishop of Cape Town - EBSCO
- Desmond Tutu - EPFL Graph Search
- The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TRC) - Apartheid Museum
- Desmond Tutu: a life in pictures - The Elders
- 노벨평화상 남아공 투투 대주교 선종 - 서울신문
- 남아공 인종차별 철폐 주역...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 선종 - 한국일보
- 데즈먼드 투투 - 나무위키
- 데스몬드 투투 - 예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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