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스 위글스워스
인물 · 같은 말: 위글스워스
스미스 위글스워스(1859~1947)는 영국의 전도자로, 초기 오순절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배관공으로 일하다가 신유(믿음으로 병이 낫는 것)와 믿음을 강조하는 순회 전도자가 되었고, '믿음의 사도'라고 불렸다.
생애
1859년 잉글랜드 요크셔의 멘스턴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일은 자료에 따라 6월 8일 또는 6월 10일로 다르게 적혀 있다. 어려서부터 밭일과 공장일로 집안을 도와야 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글도 배우지 못했다. 부모를 따라 감리교회와 성공회 교회에 다녔으며, 여덟 살 때 회심(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섬)했다고 전해진다. 열세 살 때 가족이 브래드퍼드로 이사한 뒤에는 웨슬리안 감리교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882년 구세군에서 활동하던 메리 제인 페더스톤과 결혼했다. 아내는 흔히 '폴리'라고 불렸다. 부부는 브래드퍼드에 작은 선교 집회소를 열었는데, 처음에는 주로 아내가 설교하고 위글스워스는 결신 초청(설교 뒤 믿기로 결심한 사람을 앞으로 불러내는 일)을 맡았다. 위글스워스는 배관공으로 생계를 꾸렸다. 회심하고 약 40년이 지난 뒤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1913년 아내가 세상을 떠났고, 1947년 3월 12일 웨이크필드에서 가까운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87세로 숨졌다. 시신은 웨스트요크셔 십리의 냅우드 묘지에 묻혔다.
사역과 업적
아내가 죽은 뒤 영국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1914년부터는 해외로 나가 집회를 이끌었다. 1920~30년대에는 오순절주의 진영에서 가장 많이 초청받은 강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평가된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단순한 믿음을 강조했고, 집회에서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신유 사역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지지자들은 그를 '믿음의 사도'라고 불렀다. 그의 설교는 다른 사람이 받아 적어 두 권의 책으로 묶였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위글스워스가 한국을 찾았거나 한국 교회와 직접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주로 오순절 계열과 은사주의 계열에서 믿음과 신유를 강조한 초기 오순절 전도자로 소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책이 언제 번역되었는지, 어떤 경로로 영향을 끼쳤는지는 확인되는 대로 보완해야 한다.
평가
지지자들은 그가 아내가 죽은 1913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꾸준히 사역했다는 점을 높이 산다. 또 그의 사역이 뒷날의 은사 운동으로 이어지는 바탕을 놓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기적 이야기는 대부분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증언과 전기를 통해 전해진 것이다. 병자를 대하는 태도도 거칠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전날 기도해 준 사람이 다시 기도를 받으러 나오자 "믿음이 없다"며 단상에서 내려가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적의 은사가 사도 시대 이후 그쳤다고 보는 쪽(은사 중지론)은 이런 신유 사역 주장 전반에 신중하거나 비판적이다. 은사가 오늘날에도 이어진다고 보는 오순절·은사주의 쪽은 그를 본받을 만한 믿음의 사역자로 여긴다. 이 논쟁은 은사 중지론과 지속론 문서에서 다룬다.
함께 보기 7
참고한 자료 7곳
- Smith Wigglesworth - Wikipedia
- Smith Wigglesworth (1859-1947) - WikiTree
- Rev Smith Wigglesworth (1859-1947) - Find a Grave Memorial
- Smith Wigglesworth - Wikiwand
- God's General Smith Wigglesworth
- Smith Wigglesworth
- Smith Wigglesworth 1859-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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