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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 테일러

인물 · 같은 말: 테일러, 중국내지선교회

허드슨 테일러(1832~1905)는 영국 출신의 개신교 선교사로, 1865년 중국내지선교회(CIM)를 세워 중국 내륙 선교를 이끌었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생애

1832년 잉글랜드 요크셔의 반즐리에서 태어났다. 의학과 중국어를 공부하며 선교사가 될 준비를 했다. 1853년 중국복음화협회(Chinese Evangelisation Society)의 파송을 받아 배를 탔고, 1854년 상하이에 도착했다. 1855~1856년에는 윌리엄 찰머스 번스와 함께 일했고, 1857년부터는 닝보에서 독자적으로 사역했다. 1858년 선교사 마리아 다이어(Maria Dyer)와 결혼했다. 1860년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갔으며, 이 무렵 중국복음화협회를 떠났다.

영국에 머무는 동안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중국 내륙 사람들에게 마음이 쏠렸다. 그래서 1865년 6월 25일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CIM)를 세웠다. 1866년에는 아내와 자녀들, 선교사 16명과 함께 다시 중국으로 떠났다. 1867년 딸 그레이스를 잃었고, 1868년에는 양저우 폭동을 겪었다. 선교회 일로 영국과 중국을 여러 차례 오갔으며, 1905년 6월 3일 후난성 창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역과 업적

  • 내지 선교: 바닷가 항구 도시를 벗어나 중국 내륙 깊은 곳까지 전도하는 일에 힘썼다. 1854~1860년에는 저장성 일대를 열 차례 돌아다니며 중국어 신약성경과 전도 책자를 나눠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현지 문화 받아들이기: 서양식 차림 대신 중국 옷을 입고 중국식으로 생활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중국내지선교회도 이 원칙을 따랐다.
  • 믿음 선교: 사람에게 후원을 요청하지 않고 기도로 하나님께 구한다는 재정 원칙을 내세웠다. 선교 본부를 유럽이 아닌 중국에 둔 점도 그때까지의 선교 기관과 달랐다.
  • 선교회의 성장: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소속 선교사가 수백 명으로 늘었다(80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다).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에 선교 본부를 세우는 데도 힘을 보탰다.

중국내지선교회는 그가 죽은 뒤에도 의화단 사건과 중국의 공산화 같은 위기를 겪었다. 1951년 중국에서 철수해 본부를 싱가포르로 옮겼고, 1964년 이름을 OMF(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로 바꾸어 동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한국 교회에서 테일러는 흔히 '중국 선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믿음 선교 원칙과 현지 문화를 존중한 선교 방식은 설교, 목회 칼럼, 선교 교육에서 자주 소개된다. 중국내지선교회의 뒤를 이은 OMF는 한국에서도 한국OMF(한국오엠에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평가

테일러는 중국 내륙 선교의 새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된다.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불리는 19세기 개신교 선교를 대표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다만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서양 선교는 아편전쟁 뒤 서구 열강이 중국에 진출하던 흐름 속에서 이루어졌고, 양저우 폭동처럼 현지 주민과 충돌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19세기 중국 선교 전반을 서구 열강의 진출과 묶어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함께 보기 8

참고한 자료 7곳
  1. 우리의 이야기 - 한국오엠에프 (OMF Korea)
  2. 중국 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 스크린으로 만난다 - 국민일보
  3. 개신교 선교 인물사(3) 허드슨 테일러 (1832-1905) - 기독일보
  4. 중국 종교정책의 변화와 중국 선교전략 연구 - KCI
  5. [손성진 목사의 선교史<14>] 중국 선교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
  6.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1832-1905) - 믿음의 사람
  7. 허드슨 테일러 - 오늘의AI위키

본문은 이 자료들을 참고해 새로 쓴 글이며, 자료의 글을 옮겨 싣지 않았습니다.

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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