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윌버포스
인물 · 같은 말: 윌버포스
영국의 정치인(1759~1833). 복음주의 신앙을 바탕으로 20년 가까이 의회에서 노예무역 폐지 운동을 이끌었고, 1807년 노예무역 폐지법이 제정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생애
1759년 8월 24일 잉글랜드 요크셔의 항구 도시 헐에서 부유한 상인 로버트 윌버포스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768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한동안 런던 근교 큰아버지의 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아들이 고모의 영향으로 감리교 신앙에 기우는 것을 걱정해 그를 다시 고향으로 데려왔다고 전해진다. 1776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존스 칼리지에 들어갔고, 이곳에서 훗날 총리가 되는 윌리엄 피트(소 피트)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1780년 고향 헐에서 하원의원으로 뽑혔다. 그 뒤 1784년부터 1812년까지는 요크셔, 1812년부터는 브램버 선거구를 대표했으며, 특정 정당에 속하지 않은 무소속으로 활동했다. 청년 시절 복음주의 신앙을 받아들였고, 이 신앙이 그의 정치 활동을 이끄는 힘이 되었다. 1797년 바버라 스푸너와 결혼해 여섯 자녀를 두었다. 1820년대 중반 건강이 나빠져 의회를 떠났고, 1833년 7월 29일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의회의 결정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사원 북쪽 익랑(십자형 교회 건물의 양 날개 부분)에 있는 피트의 무덤 곁에 묻혔다. 성공회는 7월 30일을 그의 기념일로 지킨다.
사역과 업적
노예무역 폐지
영국의 노예무역 반대 운동은 1780년대 초 퀘이커 교도들이 위원회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법을 바꾸려면 의회 안에서 이 일을 이끌 사람이 필요했다. 토머스 클라크슨, 해나 모어, 찰스 미들턴 같은 운동가들과 친구 피트의 권유를 받아, 윌버포스는 1787년 무렵부터 의회에서 폐지 운동을 대변하게 되었다. 1789년 5월 의회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뒤 거의 해마다 폐지 안건을 올렸다. 그러나 서인도 제도 농장주와 무역상의 반발, 프랑스와의 전쟁 같은 사정에 막혀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792년에는 폐지를 요구하는 청원서가 500건 넘게 하원에 들어왔다. 1804년에는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지만 상원에서 막혔다.
흐름은 1806년 폐지에 찬성하는 그렌빌 내각이 들어서면서 바뀌었다. 1807년 2월 23일 하원이 283 대 16으로 법안을 가결했고, 같은 해 3월 노예무역 폐지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노예무역이 금지되어도 이미 노예가 된 사람들은 풀려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 뒤로도 노예제 자체를 없애는 운동을 이어 갔다. 노예제 폐지 법안이 하원의 결정적 표결을 통과하고 사흘 뒤에 숨을 거두었으며, 이 법은 1833년 노예제폐지법으로 제정되었다.
클래펌파와 사회 개혁
윌버포스는 런던 남쪽 클래펌의 교회를 중심으로 모인 복음주의 성공회 평신도 모임인 '클래펌파'의 가장 잘 알려진 구성원이었다. 이들과 함께 영국성서공회(영국 해외성서공회)와 교회선교회를 세우는 데 참여했다. 또 주일학교 운동,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학교와 병원, 공장 노동자와 굴뚝 청소 소년의 처우 개선, 동물 학대 방지 단체 설립, 인도 선교 허용, 풀려난 노예들을 위한 시에라리온 정착지 건설 등을 지원했다. 1787년에는 국왕 조지 3세가 지나친 음주, 신성모독, 주일을 어기는 행위 같은 악덕을 단속하라는 포고를 내도록 힘썼다. 그 뒤에는 이 포고를 실천하기 위한 악덕 억제 협회를 세웠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윌버포스는 한국에서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기 반세기쯤 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한국 교회와 직접 맺은 관계는 없다. 다만 그가 설립에 참여한 영국성서공회는 뒷날 한국어 성경의 번역과 보급을 지원했고, 대한성서공회도 이 기관의 활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가
윌버포스는 노예무역과 노예제 폐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영국에서 널리 기념된다. 복음주의 진영은 그를 신앙에 바탕을 둔 사회 개혁의 본보기로 높이 평가한다.
비판도 있다. 그는 노예 문제 밖의 사안에서는 보수적이었다. 의회 개혁에 반대했고, 인신보호영장 제도(법원이 부당한 구금을 심사하는 제도)를 일시 정지하는 조치와 노동자의 단결을 금지한 1799~1800년의 결사금지법을 지지했다. 이 때문에 윌리엄 코빗, 윌리엄 해즐릿 같은 당대의 급진파 문필가들은 그가 해외 노예의 처지에는 마음을 쓰면서 국내 노동자의 고통은 외면한다고 공격했다. 노예 해방 문제에서도 그는 단계적인 해방을 주장했다. 그래서 즉시 해방을 요구한 엘리자베스 헤이릭 같은 운동가들에게서 지나치게 신중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일부 역사가는 노예제 폐지의 공로가 윌버포스와 클래펌파에 너무 쏠려 급진파를 비롯한 다른 운동가들의 몫이 가려졌다고 지적한다. 이런 평가는 교회와 정치의 관계를 생각할 때도 함께 논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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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자료 13곳
- William Wilberforce - Britannica
- William Wilberforce - Wikipedia
- William Wilberforce (1759-1833) -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 William Wilberforce, 1759-1833 - Royal Museums Greenwich
- William Wilberforce & family - Westminster Abbey
- William Wilberforce - Christianity.org.uk
- The role of the Clapham Sect in the fight for the abolition of slavery - Art UK
- The Clapham Sect and the abolition of the slave trade (4) - Evangelical Times
- William Wilberforce - EBSCO Research Starters
- Residual causes: Wilberforce and forced labour - openDemocracy
- When Freedom is at Risk, Attack Gradualism - Libertas Council
- William Wilberforce - Spartacus Educational
- Society for the Suppression of Vice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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