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역사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24년 9월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만들어진 개신교 연합기관이다. 한국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외국 선교부, 기독교 기관이 함께 참여했으며, 오늘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모체로 꼽힌다.
배경
한국 개신교에는 일찍부터 연합 기구가 있었다. 처음에는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재한복음주의선교사연합공의회'(자료에 따라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가 있었다. 1918년 3월 26일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와 북감리회 조선연회, 남감리회 조선연회의 대표들이 서울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를 처음 열었다. 이 협의회는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 차원에서 만든 첫 연합 협의체로 평가된다. 그 뒤로도 선교사들의 연합 기구는 따로 남아 있었다. 1919년 3·1운동을 겪은 뒤 교회 안에서 교회 합동 논의가 다시 일어났고, 두 기구를 하나로 묶자는 움직임이 생겼다.
전개
- 1922년 10월 26일: 장감연합협의회 제6회 회의에서 두 연합 기구의 통합을 논의했다.
- 1923년 3월: 장감연합협의회를 해산하고 새 공의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 1924년 9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창립회의를 열었다. 공의회(公議會)는 여러 교회의 대표가 모여 함께 의논하는 회의체를 뜻한다. 초대 회장에 차재명 목사, 부회장에 김종우 목사가 뽑혔다. 회원은 한국의 장로교회·감리교회, 장로교 선교부 4곳과 감리교 선교부 2곳,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와 대영성서공회 같은 기독교 기관이었다. 창립총회는 '협동하여 복음을 전함', '협동하여 사회도덕의 향상을 도모함', '협동하여 기독교 문화를 보급함'을 목적으로 하는 규칙을 채택했다.
- 1930년대 초: 이름을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로 바꾸었다. 바꾼 해는 자료에 따라 1931년 또는 1932년으로 적혀 있다. 이 무렵 공의회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밝힌 사회신조를 채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934~1935년: 1934년 제11회 총회에 대표 5명만 보냈던 장로교는 1935년부터 대표를 아예 보내지 않았다. 공의회는 교섭위원을 세워 장로교의 복귀를 계속 요청했지만 장로교는 돌아오지 않았다.
결과와 영향
공의회는 일제의 종교 간섭 속에 활동을 멈췄다. 끝난 시점은 자료마다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937년에 폐쇄되었다고 적었다.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연표는 1938년 7월에 해산했고, 그 뒤 친일 성격의 조선기독교연합회가 조직되었다고 적었다. 같은 시기에 신사참배 강요가 거세졌고, YMCA·YWCA와 주일학교연합회 같은 기독교 단체들도 강제로 해체되었다. 해방 뒤인 1946년 연합 기구가 다시 세워졌고, 이 흐름은 오늘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 이어졌다.
평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를 자기 전신으로 보고 1924년을 창립 연도로 삼는다. 이 협의회는 공의회의 정신이 해방 뒤 사회운동의 토대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한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모두 이 공의회에 뿌리를 둔다는 시각도 있다. 그래서 공의회는 특정 연합기관의 역사를 넘어 한국 개신교 에큐메니칼 운동(교파를 넘어선 교회 일치 운동)의 출발점으로 다루어진다. 다만 장로교의 이탈로 연합의 폭이 좁아졌고, 끝내 일제의 압력으로 문을 닫았다는 점에서 한계도 함께 거론된다.
함께 보기 8
참고한 자료 6곳
-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역사
- 한국기독교사 연표 - 한국기독교사연구소
-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출옥 - 한국기독교사연구소
- 개신교 통합의 불씨 살아나나 - 서울신문
본문은 이 자료들을 참고해 새로 쓴 글이며, 자료의 글을 옮겨 싣지 않았습니다.
토론 0
이 문서에 대한 의견, 다른 관점, 고칠 점을 남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