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테레사
인물 · 같은 말: 테레사 수녀
마더 테레사(1910~1997)는 인도 콜카타에서 '사랑의 선교회'를 세워 가난한 이와 병자, 죽어 가는 사람들을 돌본 천주교 수녀이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2016년 천주교에서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생애
1910년 당시 오스만 제국 땅이던 스코페에서 알바니아계 천주교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다. 1928년 아일랜드에서 로레토 수녀회에 들어갔고, 이듬해 인도로 건너가 수녀회가 운영하는 콜카타(옛 캘커타)의 성 마리아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1937년 종신서원(평생 수도자로 살겠다는 서약)을 했다. '테레사'라는 이름은 프랑스의 성녀 리지외의 테레사를 본받겠다는 뜻으로 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6년 피정(기도와 묵상을 위해 일상을 떠나 머무는 일)을 가던 기차 안에서 가난한 이들을 섬기라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한다. 1948년 수녀원을 나와 푸른 테를 두른 흰 사리(인도 여성의 전통 옷)를 입고, 기초 간호 교육을 마친 뒤 빈민가로 들어갔다. 이 무렵 인도 시민권을 얻어 평생 인도인으로 살았다. 1997년 콜카타에서 심장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역과 업적
옛 제자들이 그를 도우면서 공동체가 생겼고, 1950년 10월 7일 '사랑의 선교회'가 공식 승인을 받았다. 12명으로 시작한 선교회는 길에서 죽어 가는 이들이 홀로 죽지 않도록 거두어 돌보는 '임종의 집'에서 출발해 고아원, 빈민 학교, 진료소, 한센병 환자 시설로 일을 넓혔다. 그가 숨질 무렵에는 123개 나라 610곳에서 시설을 운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교회는 가난한 이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정신을 내세우며, 이 정신은 흔히 양과 염소 비유(마태복음 25:31-46)와 이어져 설명된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1980년 인도 최고 훈장인 바라트 라트나를 받았다. 천주교는 2016년 9월 4일 그를 성인으로 선포(시성)했다. 천주교에서는 '데레사'로 적는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생전에 한국을 세 번 찾았다. 1981년 5월 3일 첫 방한 때 서강대학교에서 강연하고, 서울 사당동의 판자촌 '가마니촌'을 찾았다. 1982년 4월에는 한국 분원을 돌아보려고 18시간가량 머물렀고, 1985년 1월에는 판문점을 방문했다. 사랑의 선교회는 1977년 남자 수도회가, 1981년 김수환 추기경의 요청으로 수녀회가 한국에 들어왔다.
천주교 수도자였지만 그의 삶은 교파를 넘어 구제와 섬김의 상징으로 자주 언급되어 왔다. 다만 개신교는 천주교의 시성 제도와 성인 공경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그를 '성녀'로 부르지 않는다.
평가
그는 '빈자의 어머니'로 불리며 가난한 이들을 대변한 인물로 널리 존경받았다. 한편 영국 언론인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이 비판을 제기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들은 임종의 집의 의료 수준, 기부금 사용의 투명성, 논란 있는 인물에게서 받은 후원 등을 문제 삼았고, 낙태와 피임에 반대한 입장도 논쟁이 되었다. 옹호하는 쪽은 이 시설이 치료를 위한 병원이 아니라 버려진 이들의 마지막을 돌보는 곳이었다고 반론한다.
함께 보기 6
참고한 자료 9곳
- 테레사 수녀 - 위키백과
- 성녀 마더 데레사 삶과 영성… 굽은 몸으로 '사랑의 기적' 이루다 (가톨릭신문)
- 사랑의 선교회 현황 (가톨릭신문)
- 마더 데레사의「사랑의선교 수녀회」한국에 진출 (가톨릭신문)
- [어제의 오늘] 1981년 마더 테레사 수녀 방한 (경향신문)
- '貧者의 어머니' 테레사 수녀 첫 방한 [역사 속의 This week] (문화일보)
- 마더 테레사 - 디지털동작문화대전
- 1910년 8월 26일, 마더 테레사 출생 (크리스천 라이프)
- 2016년 9월 4일, 마더 테레사 시성 (크리스천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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