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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부 선교사 메리 F. 스크랜턴이 서울 정동에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 교육기관이다. 오늘날 이화여자대학교와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다.

배경

19세기 말 조선에서는 여성이 학교에 다니며 공부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외국인에게 딸을 맡기려는 부모도 드물었다. 미국 북감리교의 해외 여선교회는 조선을 맡을 여성 선교사로 메리 F. 스크랜턴을 보냈다. 그는 의료 선교사인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 부부와 함께 1885년 조선에 들어왔다. 같은 정동에서 헨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연 일도 여학교를 세우는 데 자극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개

  • 1886년 2월~11월: 정동 언덕에 한옥 교사(학교 건물)를 짓기 시작해 11월에 완공하였다. 학생 35명 정도가 머물 수 있는 크기로, 교실과 교사 숙소를 갖추었다.
  • 1886년 5월 31일: 스크랜턴이 정동 자택에서 학생 한 명을 두고 첫 수업을 열었다. 이날이 창립일이 되었다. 첫 학생은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이 되려 했던 고관의 소실 김 부인이었다. 그러나 병으로 몇 달 만에 학업을 그만둔 것으로 전해진다. 그 뒤 끼니를 잇기 어려운 가난한 집 딸과 오갈 데 없는 여자아이 등이 들어왔다. 이 때문에 6월에 들어온 학생을 실질적인 첫 학생으로 보는 서술도 있다.
  • 1887년 2월: 고종이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내리고, 외무독판 김윤식을 통해 편액(이름을 새긴 현판)을 보냈다. '이화'라는 이름은 학당 근처에 핀 배꽃에서 왔다는 설과, 그 자리에 있던 정자 이화정에서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나라가 공식 학교로 인정하자 상류층 여성도 입학하기 시작하였다. 학생 수는 1887년 7명, 1888년 18명, 1893년 30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 교과로는 한글, 영어, 한문, 산술, 체조, 성경 등을 가르쳤고,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 1904년: 중학과를 두었다.
  • 1910년: 대학과를 새로 열었다.
  • 1915년: 유치원 사범과를 두었다.
  • 1918년: 고등과와 보통과를 학당에서 떼어 내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보통학교로 각각 개교하였다.
  • 1925년: 대학과와 예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하였다. 1928년에는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폐기되었다.

결과와 영향

이화여자전문학교는 일제 말기에 경성여자전문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해방 뒤에는 종합대학인 이화여자대학교가 되었다. 중등 과정은 이화여자고등학교로 이어졌다. 이화여자대학교는 영문 이름에 'Womans'라는 단수형을 쓰는데, 학생 한 명으로 시작한 역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이 널리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 유관순도 이화학당에서 공부하였다.

정동에는 정동제일교회를 사이에 두고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나란히 서 있었다. 두 학당의 이름은 모두 고종이 지어 주었다. 이 일대는 초기 한국 감리교 선교의 중심지였다.

평가

이화학당은 여성 교육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거의 없던 1880년대부터 꾸준히 학생을 가르쳤다. 그래서 한국 여성 근대 교육의 효시(처음 시작)로 평가받는다. 교단과 관계없이 초기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학교를 통한 선교, 곧 교육 선교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오늘날 기독교 학교 전통의 뿌리 가운데 하나로도 다루어진다.

함께 보기 8

참고한 자료 7곳
  1. 이화학당 - 위키백과
  2. 이화학당 - 우리역사넷
  3. 1886년 우리나라 최초 근대 여성교육기관 '이화학당' 창립 - 문화일보
  4. 1886년 05월 31일 이화학당 설립 - 평양대부흥
  5. 연혁 - 이화여자대학교
  6. 교명 - 이화여자대학교
  7. 배꽃 핀 언덕, 이화학당 - 기독신문

본문은 이 자료들을 참고해 새로 쓴 글이며, 자료의 글을 옮겨 싣지 않았습니다.

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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