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레이번 전킨
인물 · 같은 말: 메리 전킨, Mary Leyburn Junkin
메리 레이번 전킨(1866~1952)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이다. 남편 윌리엄 전킨(전위렴)과 함께 1892년 남장로교가 처음 보낸 '7인의 선발대'로 한국에 와서 서울·군산·전주에서 일했다.
생애
메리 레이번은 미국 버지니아주 렉싱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866년 1월 21일에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1865년으로 적은 자료도 있다. 그녀의 집안은 렉싱턴의 워싱턴 앤드 리 대학교, 버지니아 군사학교와 인연이 깊었다. 그러나 이 학교들은 여성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이웃 도시 스톤턴의 오거스타 여자신학교(Augusta Female Seminary)에 다녔다. 이 학교는 뒤에 메리 볼드윈 대학교가 되었다. 국내 연구에서는 '메리(마리온) 몬태규 레이번'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1892년 6월에 윌리엄 전킨과 결혼하였다. 같은 해 11월 무렵, 결혼한 지 다섯 달 만에 미국 남장로교가 처음 한국에 보낸 선교사 일곱 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들어왔다. 이 일곱 명을 흔히 '7인의 선발대'라 부른다. 선발대에는 윌리엄 레이놀즈와 팻시 볼링 레이놀즈 부부, 독신 여선교사 리니 데이비스와 매티 테이트 등이 있었다.
전킨 부부는 한국에서 여덟 자녀를 낳았는데, 그 가운데 셋이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1908년에 남편이 폐렴으로 43세에 숨지자, 그녀는 같은 해 4월 남은 자녀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막내는 아직 뱃속에 있었다. 1909년 미국 장로교회는 선교사 유족을 돕기 위해 버지니아주 프레더릭스버그에 집을 지어 그녀에게 주었다. 1952년 11월 2일에 세상을 떠났고 고향 렉싱턴의 오크 그로브 묘지에 묻혔다.
사역과 업적
한국에서 그녀는 서울을 거쳐 군산과 전주에서 일했다. 한국어를 배웠고, 여자아이들의 주일학교 반을 맡아 가르쳤다. 1903년 선교 보고서에 따르면 이 반에는 열일곱 명이 등록했고 평균 열두 명가량이 나왔다. 같은 보고서에서 그녀는 남자아이들만 글을 배우는 현실을 걱정하였다. 다른 여선교사가 여자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열자 무척 기뻤다고도 적었다. 1902년 무렵에는 군산의 멜볼딘여학교에서 교육을 맡은 것으로 소개된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미국으로 돌아간 뒤 그녀는 미국 선교부의 도움을 받아 지름 90cm의 종을 만들어 전주서문교회에 보냈다. 남편을 기념하기 위한 종이었다. 교인들이 정성을 모아 지은 높이 7m가량의 나무 종각은 지금도 교회 입구에 서 있다. 1952년에는 전라북도지사가 그녀에게 감사장을 보냈다. 이 감사장 원본은 70여 년 뒤 후손들을 통해 군산의 전킨기념사업회에 기증되었다.
평가
그녀는 호남 지역 장로교 선교의 첫 세대를 이룬 인물로 꼽힌다. 무엇보다 여자아이 교육에 관심을 기울인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교회사학자들은 그녀를 비롯한 초기 여성 선교사들이 남성 못지않게 헌신했는데도, 연구는 부족하거나 남편의 사역을 다루면서 잠깐 언급되는 데 그쳐 왔다고 지적한다.
함께 보기 8
참고한 자료 6곳
- M. Junkin (Mary Junkin 메리 전킨)
- 선교사 리스트(1892-1942)
- 미 남장로교 파송 메리 몬태규 레이번 선교사 연구 - 교회와신앙
- History Thursday: 504 Fauquier Street
- 버려진 땅에 학교·병원·고아원… 7인의 헌신으로 일군 '호남 첫 교회'
- 74년만에 돌아온 감사장…전킨 선교사 후손, 군산에 기증 - 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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