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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

인물 · 같은 말: 헐버트

호머 헐버트(1863~1949)는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이자 교육자이다. 1886년 육영공원의 영어 교사로 조선에 왔다. 이후 한글 보급과 언론·저술 활동을 했고,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도우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생애

호머 베절릴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븐에서 태어났다.

1886년, 23세 때 조선 정부가 세운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의 영어 교사로 처음 조선에 왔다. 이후 감리교 선교사로서 교육·언론·역사 연구 분야에서 활동했다.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서양 여러 나라와 대화하는 창구 역할도 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활동이 실패로 끝난 뒤 일본의 압력으로 사실상 한국에서 쫓겨났다. 그 뒤 미국에서도 재미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하려고 7월 29일 약 40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그러나 고령에 긴 여행의 피로가 겹쳐 8월 5일 서울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생전의 뜻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었다.

사역과 업적

  • 교육과 한글: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배재학당에서 인연을 맺은 주시경 등과 교류하며 한글 연구와 보급을 도왔고, 띄어쓰기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언론과 저술: 월간지 『한국평론』을 펴내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금속활자·거북선·훈민정음 같은 한국 문화와 한글의 우수성을 서양에 알렸다. 대표 저서로는 한국어판 제목이 『대한제국 멸망사』인 책이 꼽힌다.
  • 독립운동 지원: 1905년 을사늑약(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조약)이 맺어지자 고종의 비밀 편지를 들고 미국으로 갔다.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만나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1906년 다시 한국에 와서 고종에게 헤이그로 밀사(비밀 사절)를 보내자고 건의했다.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 때 이상설·이준·이위종의 파견을 도왔고, 자신도 고종에게서 특사증을 받아 헤이그로 갔다. 대표단보다 먼저 도착해 회의 소식지에 한국 대표단의 호소문이 실리게 했다. 이런 활동 때문에 '제4의 특사'로 불린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헐버트는 감리교 선교사였지만, 그의 활동은 주로 학교·출판·외교 분야에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초기 내한 선교사들이 복음 전도 밖의 영역에서 한국 사회와 어떻게 만났는지를 보여 주는 인물로 거론된다. 그의 묘가 있는 양화진 묘원은 초기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장소로 함께 소개된다.

평가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그에게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했다. 2014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흔히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으로 기억된다.

한편 헤이그 특사 활동은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잃었다는 이유로 공식 회의 참석이 거부되어 본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또 그의 한글 연구 기여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오늘날의 한글 표기법이 헐버트 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며 과장을 경계하는 지적도 있다.

함께 보기 8

참고한 자료 6곳
  1. 호머 헐버트 - 위키백과
  2. 헬로, 헐버트! 외국인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정동야간탐방 (내 손안에 서울)
  3. 고국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푸른 눈의 조선인 헐버트의 발자취 (국립한글박물관 한박웃음 제76호)
  4. 헤이그의 또 다른 특사 헐버트 (월간 독립기념관 2023년 6월호)
  5. 호머 헐버트 인물소개 (교보문고)
  6. [윤재석의 시선] 한글날 다시 기억하는 헐버트 박사 (아시아엔)

본문은 이 자료들을 참고해 새로 쓴 글이며, 자료의 글을 옮겨 싣지 않았습니다.

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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